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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7 (퀼른 런던 망명기)

by 클레스트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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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무르면서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를 파리로 옮기고 파리에 살던 독일인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독일노동자동호회를 설립했다. 혁명이 독일에까지 번지기를 기대하며 마르크스는 1848년 쾰른으로 갔고,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라는 찌라시를 돌리고 다녔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열 가지 요지 중 네 가지만 발췌, 재인용하여 혁명을 선동했다.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키려면, 우선 독일 부르주아들이 봉건군주제와 귀족제를 전복시키는 시민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년 6월 1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유산을 털어 《신라인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유럽 전역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주필이자 대기자로서 신문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다른 맹원들도 기고를 하기는 했지만,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신라인신문》은 그야말로 마르크스 독재였다.

여하튼 이때 기사 작성 등의 이유로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한 흔적이 담겨있는 노트 등이 여전히 유품으로 남아있다. 이때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써낸 게 '정치경제학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 '잉여가치론' 등. 영국 체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인물들에는 그의 맹우 엥겔스 이외에도 카를 카우츠키, 폴 라파르그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중요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이들의 활동은 훗날에 세계 최초의 국제노동자연대 운동으로 발전할 "인터내셔널"을 낳게 된다.

마르크스 등 혁명가들은 경찰에 정기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마르크스는 여러 번 기소되었다. 마르크스가 기소된 혐의는 검사장 모욕죄, 언론지상 경범죄, 조세거부 및 무장반란 선동죄 등이었는데,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한편, 혁명으로 수립되었던 프로이센의 민주주의 의회가 붕괴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새 내각을 반동주의자들로 채워 반혁명 정책을 실시했다. 좌익을 비롯해 혁명분자들은 프로이센에서 숙청되었다.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고, 《신라인신문》은 폐간, 마르크스는 5월 16일 추방령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는 반혁명이 기승을 부리고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마르크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아내 예니가 곧 넷째 아이를 낳을 판이었는데, 독일도, 벨기에도, 프랑스도 머무를 수 없게 된 마르크스는 마침내 1849년 8월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놓아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129]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한 줌 인간들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매진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봉기들이 분쇄당한 현재(1850년경)의 사회발전단계로 미루어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진보적 부르주아들과 합작하여 봉건귀족제를 우선 타파하도록 공산주의자동맹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정부개혁, 입헌공화국, 자유선거, 보통(남성)선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여해야 하며, 노동계급 의제와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 결과를 거둔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1841년 호러스 그릴리가 창간한 신문으로, 진보적 부르주아 언론인, 출판인들이 편집주간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지 리플리, 찰스 앤더슨 다나 등이 있었다. 신문 주필이었으며 또한 푸리에주의자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다나가 마르크스의 주 거래처였다. 《트리뷴》은 마르크스가 대서양 너머의 헨리 찰스 케리와 '숨은 전쟁'을 벌이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이 신문은 여러모로 노동계급 친화적이었는데, 우선 값이 2 센트로 저렴했다.[141] 또한 발행부수가 50,000 부로 그 회전율이 당대 미국에서 최대 수준이었다. 편집주간들은 진보적이었고, 창업주 그릴리 본인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로 그 관점이 신문 논조에 반영되었다. 마르크스가 이 신문에 송고한 첫 기사는 영국 의회선거에 관한 것이었으며, 1852년 8월 21일 게재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내홍을 겪은 끝에 마르크스의 입장이 승리하고, 빌리히와 샤퍼 등은 탈당했다. 한편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교육결사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결사는 런던 도심 유흥가인 소호 그레이트윈드밀가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단체 역시 마르크스를 따르는 무리와 샤퍼, 빌리히를 따르는 무리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는 샤퍼, 빌리히 파벌에게 패배했고, 1850년 9월 17일 단체에서 탈퇴했다.

런던 망명기 초기에 마르크스는 오로지 혁명활동에만 골몰했기에 마르크스 가족은 극심한 빈곤을 겪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용돈을 받아 연명했고, 엥겔스의 그 돈은 엥겔스의 부유한 자본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프로이센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굴리면서 그 지면을 통해 예상 독자인 노동계급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무일푼이 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새로 만들 수 없었고, 국제언론으로 관심을 선회한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미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의 6개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것이 그동안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부르주아" 언론들에 기사를 써가며 입에 풀칠을 했다. 마르크스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사를 독일어로 써서 빌헬름 피퍼에게 영어로 번역을 맡겼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전까지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기자일을 했다.



1857년 3월 21일,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불경기 때문에 매주 기사 한 부치 고료만 주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특파원들은 기사가 지면에 실려야 고료를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아도 매주 한 부치의 고료는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기사를 송고했다. 10월이 되자 《트리뷴》은 재정 악화가 더 심해져 마르크스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럽 특파원들을 잘랐고, 마르크스도 주 1회 기사로 일감이 줄어들었다. 1860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의 기사는 달랑 다섯 번 지면에 게재되었다. 6개월 쉬고, 마르크스는 1861년 9월부터 1862년 3월까지 기사를 썼다. 그 뒤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미국 국내 문제로 인해 《트리뷴》에는 더이상 런던 특파원 자리를 둘 여유가 없다고 편지를 썼다. 1857년 4월,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신미국백과》의 전쟁사 부문 집필을 주선했다. 다나의 친구이자 《트리뷴》 문예주간이었던 조지 리플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백과사전에 67개 항목을 기여했다. 그 중 대다수인 51개가 엥겔스가 쓴 것이었지만, 마르크스도 대영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다소간의 연구로 도와주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경제이론 및 역사진보이론에 반영시켰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적 추진력이 소진된 것 같은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가 "모험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다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마르크스는 "의지의 힘" 따위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며, 경제적 요소야말로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여겼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다. 물론 이 정도 경제는 아직 자본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미국의 사회불안정은 서부의 빈 땅 개발 바람으로 희석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경제위기가 유럽 대륙의 경제에 혁명적 확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유럽의 각 국가들은 국경선을 경계로 철저한 폐쇄경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공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서, 그전까지의 경제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18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유럽 사정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마르크스의 기사들도 '노예제 위기'나 1861년 미국 내전 발발 같은 미국 국내 문제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1851년 12월에서 1852년 3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한 이론연구를 집대성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 무산자독재,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무산자의 승리 등 여러 개념을 넘나들었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185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주의 관념론과 "장년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념이 철학적으로 단절되는 경계선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이 도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13년간 궁한 생활을 감당하느라 여러 가지 부업을 뛰었고, 경제학 연구는 거의 내팽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경제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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