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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6 (망명기)

by 클레스트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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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저술활동은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1849년 독일 쾰른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렇지만 밑천을 까먹은 채로 추방당해서인지 이전까지 풍족하게 살았던 마르크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다. 신문 기고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런던에 살면서 낙후된 주택에서 주거하고 그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결국 자식 6명 가운데 3명이 죽는 비참한 경험을 하고 만다. 이후 경제적 어려움은 엥겔스의 지원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를 통해 겨우 개선되었다. 그렇게 마르크스는 런던 중심부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34년 동안 거주하며 지속적인 저술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르크스가 벨기에 브뤼셀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1845년 2월이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는 현재의 정치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온 다른 사회주의자들(모제스 헤스, 카를 하인첸,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등)이 많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같은 해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 얼마 뒤 엥겔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는 메리 번스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떠나 브뤼셀로 와 엥겔스에게 합류했다.

1845년 7월 중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잉글랜드로 가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첫 영국행이었으며, 1842년 11월부터 1844년 8월까지 이미 2년간 맨체스터에 머물렀던 엥겔스가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해주었다. 엥겔스는 그 사이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차티스트 운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고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 그랬기에 엥겔스는 잉글랜드의 차티스트, 사회주의 언론들을 물어다 주는 기자 노릇까지 해주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잉글랜드 여행을 런던과 맨체스터의 다양한 도서관들에서 경제학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즈음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합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는데, 이것은 역사적 유물론 개념에 관한 그의 최고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 등 청년 헤겔학파, 그리고 그룬 같은 관념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로지 유물적인 것이 역사를 유일한 추동하는 힘이라는 자신들의 철학을 마침내 완성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형태로 쓰여졌지만, 그럼에도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다른 초기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고, 1932년에야 초판이 출간되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신문사이자 공화당 지지 성향의 진보 매체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런던 특파원으로 취직하면서 벌어먹는 돈으로 그런대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고,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다만 이때 벌어들인 수입은 단순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48] 잘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는 아니기는 했다. 이때 마르크스는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에 대영도서관에서 영국과 유럽 각지의 신문들을 살펴보면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주요 소식에 대한 칼럼을 썼고, 때때로 미국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기사를 작성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한 마르크스는 '진실로 과학적인 유물론 철학'의 견지에서 작동하는 '혁명적 무산자 운동'의 '이론과 전술'에 관한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 사이에 구분을 짓고자 하는 의도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람이란 자신의 경제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가 동원되어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최대의 물질적 이득을 보장한다고 계급 단위의 선동을 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음 책의 주제로 계획한 것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1847년작)이라고 붙였다. 또한 이 제목은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이론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1840년)의 '소시민적 철학'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이나 아편전쟁에 대해서 서술한 마르크스의 글도 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현대 기준에서 보았을 때 현장성이나 객관성은 부족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역사적인 지식과 경제적인 지식, 엥겔스가 가지고 있는 군사학적인 지식 등을 백분 활용하면서 칼럼과 기사를 작성했기에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하튼 미국 신문 특파원을 지냈던 인물이었기에 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즘 광풍이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냉전시기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 당시 마르크스는 남북전쟁에 있어서 당연히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링컨 대통령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라면서 호평했다. 이후로 특파원 일을 때려친 이후로도 링컨과 여러 번 서신 교환을 하면서 노예해방선언과 재선 당시에 축하편지를 내보냈다. 물론 링컨의 모든 면모를 다 호평한 건 아니고 무덤덤한 어법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불만을 가지기는 했다. 사실 냉전기 때의 일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마르크스가 미국 식자층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물이었던 데다가 링컨이 보호무역론자였던 면도 있었다. 즉, 21세기 기준에서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당대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마르크스와 링컨이 사상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보수주의 정당이 아니라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인식되었을 때이기도 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마르크스의 딸들
《독일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공산당 선언〉의 토대를 놓은 준비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도 의인동맹과의 관계를 계속했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이 노동계급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대규모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즉 의인동맹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비밀결사적 지하활동이 중단되고, 공개적인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의인동맹 맹원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결국 설득되었고,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지상 공개단체로 전환, 새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이라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과 조직원리 작성에 참여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으로서 〈공산당 선언〉을 1847년 12월부터 1848년 1월에 걸쳐 공저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21일 처음 공개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더이상 비밀결사가 아니고, 의인동맹 시절 그랬던 것처럼 신념을 숨기지 않으며 공개적인 대중행동을 목표로 삼을 것을 천명했다. 〈공산당 선언〉의 첫 줄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부유한 자본가 계급)와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 계급)의 이해가 서로 충돌하기에 상호 계급간의 적대가 발생함을 분석한다. 또한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당대의 다른 사회주의 단체,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진짜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이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임을 논했다.

그해 말, 유럽 전역은 1848년 혁명으로 시위, 반란, 폭력적 대격동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런 혁명활동들에 호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아버지의 유산(아버지는 1838년 죽었지만 그때까지 삼촌 라이오넬이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6,000 내지 5,000 프랑을 받았는데, 마르크스가 그 중 3분의 1을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되고 있지만, 어쨌든 벨기에 법무부는 마르크스가 그런 반란모의를 했다고 기소, 체포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이제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프랑스로 도망갔다.

그렇지만 뉴욕 트리뷴 지가 1857년 경제 공황과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재정이 흔들거리기 시작하면서 유럽 특파원들을 잇따라 해고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저명한 칼럼니스트였기 때문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1862년에 뉴욕 트리뷴지와의 관계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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