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이후, 마르크스는 동시대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철학 이론을 담은 저서를 발행하고자 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1845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39] 집필을 시작하여 1년만인 1846년에 완료하였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훗날 과학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다. 기존 독일 철학에 만연하던 헤겔 철학의 관념성과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철학을 새로이 세웠다. 또 과학적 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역사에 유물론을 적용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순환적 상호작용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된다고 봤다.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르크스가 벨기에 브뤼셀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1845년 2월이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는 현재의 정치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온 다른 사회주의자들(모제스 헤스, 카를 하인첸,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등)이 많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같은 해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얼마 뒤 엥겔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는 메리 번스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떠나 브뤼셀로 와 엥겔스에게 합류했다.
이후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피력했던 경제학적 사상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에서 보다 구체화시켰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단계인 단순 협업, 매뉴팩처, 공장제 기계공업의 개요를 훌륭히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의 분업과 기계제 생산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데, 혁명적 측면들을 강조한다. 즉 자본주의적 공장의 노동조건은 분명 인간적인 것은 아니지만 산업발전에서 필연적인 단계이며, 생산의 발전과 집중에 크게 촉진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현대적 노동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공산당 선언〉의 토대를 놓은 준비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도 의인동맹과의 관계를 계속했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이 노동계급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대규모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즉 의인동맹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비밀결사적 지하활동이 중단되고, 공개적인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의인동맹 맹원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결국 설득되었고,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지상 공개단체로 전환, 새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이라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과 조직원리 작성에 참여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으로서 〈공산당 선언〉을 1847년 12월부터 1848년 1월에 걸쳐 공저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21일 처음 공개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더이상 비밀결사가 아니고, 의인동맹 시절 그랬던 것처럼 신념을 숨기지 않으며 공개적인 대중행동을 목표로 삼을 것을 천명했다. 〈공산당 선언〉의 첫 줄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부유한 자본가 계급)와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 계급)의 이해가 서로 충돌하기에 상호 계급간의 적대가 발생함을 분석한다. 또한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당대의 다른 사회주의 단체,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진짜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이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임을 논했다.
그해 말, 유럽 전역은 1848년 혁명으로 시위, 반란, 폭력적 대격동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런 혁명활동들에 호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아버지의 유산(아버지는 1838년 죽었지만 그때까지 삼촌 라이오넬이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6,000 내지 5,000 프랑을 받았는데, 마르크스가 그 중 3분의 1을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되고 있지만, 어쨌든 벨기에 법무부는 마르크스가 그런 반란모의를 했다고 기소, 체포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이제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프랑스로 도망갔다.
1845년 7월 중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잉글랜드로 가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첫 영국행이었으며, 1842년 11월부터 1844년 8월까지 이미 2년간 맨체스터에 머물렀던 엥겔스가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해주었다. 엥겔스는 그 사이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차티스트 운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고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 그랬기에 엥겔스는 잉글랜드의 차티스트, 사회주의 언론들을 물어다 주는 기자 노릇까지 해주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잉글랜드 여행을 런던과 맨체스터의 다양한 도서관들에서 경제학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곧 다른 혁명가나 사상가들과 충돌했다.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 때에는 사회주의자 빌헬름 바이틀링과 공산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혁명 참여를 놓고 대립했다. 바이틀링은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에 큰 기여를 했지만 정작 노동자 계급의 혁명에 대해 줄곧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 왔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바이틀링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라고 일갈했고 그렇게 둘은 결별했다.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도 견해 차이가 두드러졌다. 처음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은 서로를 좋게 여겼으나 프루동의 개혁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소시민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한 이상론이었다. 프루동이 1846년 <빈곤의 철학>을 쓰자, 마르크스는 프루동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관과 경제관을 다룬 <철학의 빈곤>(1847)을 집필했다.
혁명운동을 위한 실천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 정당은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를 결집시킬 수 있도록 국제주의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망명지 브뤼셀에서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타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락과 연대를 지향했다. 또한 독일의 혁명적 클럽 의인동맹이 점차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며 마르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정식으로 의인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의인동맹은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같은 해 독일의 망명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도움으로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기관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1847년 말부터는 사회주의 신문 <브뤼셀 독일어 신문>을 장악하여 1848년 2월까지 비공식적 기관지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관하는 국제 자유 무역 회의에 참가했지만 회의 주최자들의 독단적 진행으로 발언을 하지 못하자 언론을 통해 크게 비난했다. 이때 그가 작성한 기사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통한 사회 질서 전체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의 규합에서 힘써서 1847년 11월 '브뤼셀 민주주의회'를 발족시켰다. 공산주의자 동맹도 성장하여 노동자 정당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였고 각지의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원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미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회에서 문답 형식의 글을 써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부족한 편이었다. 엥겔스는 문답 형식을 버리고 선언의 형식으로 공산주의의 신조에 대해 논해보자고 제안했고 마르크스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 1847년 11월의 대회에서 참가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마르크스가 강령 작성을 위탁 받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선언 집필을 시작했다. 1847년 말부터 시작된 집필은 1848년 초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강령을 담은 <공산당 선언>(1848)이 출판됐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옹호했으며 그 전위로서 공산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6 (망명기) (1) | 2023.04.16 |
---|---|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5 (헤겔주의, 라인신문) (1) | 2023.04.16 |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3 (0) | 2023.04.16 |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2 (0) | 2023.04.16 |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1 (0) | 2023.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