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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5 (헤겔주의, 라인신문)

by 클레스트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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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한 줌 인간들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매진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봉기들이 분쇄당한 현재(1850년경)의 사회발전단계로 미루어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진보적 부르주아들과 합작하여 봉건귀족제를 우선 타파하도록 공산주의자동맹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정부개혁, 입헌공화국, 자유선거, 보통(남성)선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여해야 하며, 노동계급 의제와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 결과를 거둔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이 집필된 1848년은 유럽에 있어서 혁명의 해였다. 그 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루이 필리프가 폐위되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또한 3월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쳐 메테르니히가 실각해 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마르크스는 이 일련의 혁명들에 열광하였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역할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그는 유럽의 여러 혁명 조직을 모아 민중의 비조직성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조직 간의 통일 또한 도모하였다. 또한 이 시기 혁명을 겪은 프랑스가 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함과 동시에 벨기에가 브뤼셀을 떠날 것을 명령하면서 마르크스는 파리로 되돌아 왔다. 파리에 돌아온 후에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 창설에 착수하며 독일의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내홍을 겪은 끝에 마르크스의 입장이 승리하고, 빌리히와 샤퍼 등은 탈당했다. 한편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교육결사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결사는 런던 도심 유흥가인 소호 그레이트윈드밀가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단체 역시 마르크스를 따르는 무리와 샤퍼, 빌리히를 따르는 무리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는 샤퍼, 빌리히 파벌에게 패배했고, 1850년 9월 17일 단체에서 탈퇴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1848년 5월 조국으로 향했다. 그는 쾰른에서 주거 허가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혁명운동에 동참했다. 1848년 6월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뒤를 잇는 <신라인신문>을 발행하였다. 민주주의 기관지라는 부제를 단 이 신문에서 마르크스는 편집장이 되어 1848년에 발생한 유럽 전역의 혁명들을 상세히 보도하고 분석했다. 또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했으며 그 안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입장을 반영하였다. 특히 독일 혁명에 있어서 그것이 지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정신조차도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했다며 혁명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과 타협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반동 부르주아지를 비난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민중이 새로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량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공산주의자 동맹 내 분파들을 공격하며 혁명의 투쟁성을 강조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1841년 호러스 그릴리가 창간한 신문으로, 진보적 부르주아 언론인, 출판인들이 편집주간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지 리플리, 찰스 앤더슨 다나 등이 있었다. 신문 주필이었으며 또한 푸리에주의자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다나가 마르크스의 주 거래처였다. 《트리뷴》은 마르크스가 대서양 너머의 헨리 찰스 케리와 '숨은 전쟁'을 벌이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이 신문은 여러모로 노동계급 친화적이었는데, 우선 값이 2 센트로 저렴했다.또한 발행부수가 50,000 부로 그 회전율이 당대 미국에서 최대 수준이었다. 편집주간들은 진보적이었고, 창업주 그릴리 본인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로 그 관점이 신문 논조에 반영되었다. 마르크스가 이 신문에 송고한 첫 기사는 영국 의회선거에 관한 것이었으며, 1852년 8월 21일 게재되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꺼져갔다. 그해 6월 파리에서는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있었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에게 패배했고, 10월에는 빈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변혁명 세력은 혁명 세력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어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이 탄압을 받았다. 이에 맞서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은 대중 집회, 반정부적 논조, 납세 거부 등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계엄령, 체포, 신문 정간, 고발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언론 탄압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신라인신문>은 자신의 혁명적 논조를 포기하지 않으며 독일의 혁명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런던 망명기 초기에 마르크스는 오로지 혁명활동에만 골몰했기에 마르크스 가족은 극심한 빈곤을 겪어야 했다.[134][135]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용돈을 받아 연명했고, 엥겔스의 그 돈은 엥겔스의 부유한 자본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135] 프로이센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굴리면서 그 지면을 통해 예상 독자인 노동계급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무일푼이 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새로 만들 수 없었고, 국제언론으로 관심을 선회한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미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의 6개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것이 그동안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부르주아" 언론들에 기사를 써가며 입에 풀칠을 했다. 마르크스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사를 독일어로 써서 빌헬름 피퍼에게 영어로 번역을 맡겼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전까지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기자일을 했다.

1849년 5월에 들어서자 독일 남부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혁명 세력의 봉기가 발생했다. <신라인신문>은 혁명 세력을 응원하며 봉기를 진압하려는 프로이센 당국의 야만적 처사를 낱낱이 폭로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일련의 봉기들이 진압되고 나자 <신라인신문>을 폐간하려고 들었다. 마르크스는 24시간 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려는 요구를 받았으며 그의 동지와 조력자들도 기소되거나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마르크스는 정부가 강제로 폐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끝내버리자며 1849년 5월 19일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를 발행했다. 폐간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계급의 해방!"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노동자들에게 전했으며, 페르디난드 프라일리그라트라는 시인의 고별시를 붉은 잉크로 인쇄하였다.

<신라인신문> 폐간 이후 마르크스는 쾰른을 떠나 독일 남서부를 떠돌다가[42]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승리가 유럽에서의 혁명 승리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래서 그곳의 비밀 조직들과 접촉했지만 이들의 6월 중순에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프랑스 정부는 대탄압에 들어갔고 마르크스는 8월 경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로 떠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8월 24일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1857년 3월 21일,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불경기 때문에 매주 기사 한 부치 고료만 주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특파원들은 기사가 지면에 실려야 고료를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아도 매주 한 부치의 고료는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기사를 송고했다. 10월이 되자 《트리뷴》은 재정 악화가 더 심해져 마르크스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럽 특파원들을 잘랐고, 마르크스도 주 1회 기사로 일감이 줄어들었다. 1860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의 기사는 달랑 다섯 번 지면에 게재되었다. 6개월 쉬고, 마르크스는 1861년 9월부터 1862년 3월까지 기사를 썼다. 그 뒤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미국 국내 문제로 인해 《트리뷴》에는 더이상 런던 특파원 자리를 둘 여유가 없다고 편지를 썼다. 1857년 4월,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신미국백과》의 전쟁사 부문 집필을 주선했다. 다나의 친구이자 《트리뷴》 문예주간이었던 조지 리플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백과사전에 67개 항목을 기여했다. 그 중 대다수인 51개가 엥겔스가 쓴 것이었지만, 마르크스도 대영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다소간의 연구로 도와주었다.

18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유럽 사정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마르크스의 기사들도 '노예제 위기'나 1861년 미국 내전 발발 같은 미국 국내 문제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1851년 12월에서 1852년 3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한 이론연구를 집대성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 무산자독재,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무산자의 승리 등 여러 개념을 넘나들었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185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주의 관념론과 "장년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념이 철학적으로 단절되는 경계선이 있다고 주장한다.[148][149][150][151][151]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이 도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경제이론 및 역사진보이론에 반영시켰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적 추진력이 소진된 것 같은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가 "모험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다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마르크스는 "의지의 힘" 따위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며, 경제적 요소야말로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여겼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다. 물론 이 정도 경제는 아직 자본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미국의 사회불안정은 서부의 빈 땅 개발 바람으로 희석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경제위기가 유럽 대륙의 경제에 혁명적 확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유럽의 각 국가들은 국경선을 경계로 철저한 폐쇄경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공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서, 그전까지의 경제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153]

이렇듯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13년간 궁한 생활을 감당하느라 여러 가지 부업을 뛰었고, 경제학 연구는 거의 내팽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경제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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