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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3

by 클레스트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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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4년 마르크스와 처음 만났다.
1844년 8월 28일, 마르크스는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후일 평생의 물주가 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자기가 최근 출간한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을 보여주었고, 노동계급이 역사의 최종혁명의 주체이자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논했다. 곧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마음이 맞아 마르크스의 옛 친구인 브루노 바우어를 공격하는 데 합작했다. 그 결과물은 1845년 《성가족》으로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막스 슈티르너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같은 청년 헤겔학파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 엥겔스와 함께 포이어바흐 유물론마저 등지게 되었다.

바노가 38번지에 살던 시절(1843년 10월-1845년 1월),[70]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스미스, 리카도, 제임스 밀 등), 프랑스 사회주의(생시몽 백작, 푸리에 등), 프랑스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 중 정치경제학 연구는 마르크스가 이후 여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가 되었고, 그 결실이 생애 말년에 3권짜리 대표작 《자본론》으로 맺어지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크게 세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독일의 헤겔변증법,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의 고전경제학이 그것이다. 헤겔변증법은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부터 공부했던 것이고, 나머지 둘을 마르크스가 파리 체류기에 연구하기 시작했음은 마르크스주의의 3대요소가 늦어도 1844년 가을에 일단 모두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른 일들, 예컨대 급진 언론사의 기고자나 편집진으로 참여하거나 시민들의 잠재적 혁명행동을 선동하는 조직지도작업 따위로 자주 새었기 때문에 이 연구는 매우 느려진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언제나 경제학 연구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본주의의 내부적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골조는 카를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머릿속에 1844년 말에 이미 준비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으로 세계 정치경제학의 다양한 양상을 상세하게 해석하는 것, 마르크스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경제학 이론을 명료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를 저술한다. 이 초고는 다양한 주제들을 오가며 소외노동의 개념을 구체화한다. 계속된 정치경제학 연구 끝에 마르크스는 1845년 봄, 자신의 새로운 정치경제이론, 과학적 사회주의가 보다 철저한 유물론적 세계관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학 철학 초고》는 1844년 4월에서 8월 사이에 저술되었다. 하지만 초고를 퇴고하던 마르크스는 이 내용이 포이어바흐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완성을 위해 포이어바흐 유물론과의 단절을 추구했기에 이듬해(1845년 4월)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기면서 11개 명제로 구성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작성한다. 〈테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지막 명제인 제11명제다. 그 내용인즉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관념론 전반, 즉 자기 이외의 모두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 철학은 관조적이며, 관념론 철학은 실천을 이론으로 축소시킨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현실세계보다 추상적 실재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첫 번째 편린이 이 〈테제〉에서 소개된다. 바로 세계는 idea(생각, 관념, 사상)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물리적인, 물질적인 활동과 실천으로만 변화된다는 것이다. 1845년, 프로이센의 요청으로 프랑스 정부가 《전진!》을 폐간시켰다. 프랑스 내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실업자가 된 마르크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프랑스에서 쫓겨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계속하자는 희망을 품고 브뤼셀로 갔다.

<독불연보>는 비록 실패했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혁명가들과 함께 <전진!>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했다. 마르크스는 잡지에서 슐레지엔 지방 방직공들의 봉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프로이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하였다. 또한 자신과 결별한 루게를 비롯한 부르주아 사상가들과도 대립하였다. 이런 활동은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획득에 대한 필요성을 마르크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다가 잡지를 준비하면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짐에 따라 둘은 정기적인 서신 교환과 만남을 시작했다. 둘의 교류는 계속 이어져 1844년 말 헤겔 청년파를 겨냥하여 비판하는 <신성가족>(1848)을 공동으로 저작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한편 파리에 망명한 동안 마르크스는 많은 철학자, 혁명가, 사상가들을 만났다. 당시 파리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이끄는 푸르동주의, 샤를 푸리에를 포함하여 이상주의자들의 사상을 따르는 공상적 사회주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주장한 블랑키주의, 미하일 바쿠닌이 말하는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혁명적 사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의인동맹'[33]이라는 독일의 혁명적 클럽과도 관계를 맺었고, 문학가들과도 접촉하면서 이들의 문학에 혁명성을 띄게 영향을 미쳤다.[34] 또한 연구 활동도 계속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의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한 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공부도 했다. 이때의 경제학 연구 성과는 <1844년 경제 철학 수고>(1844)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활동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잡지 <전진!>이 곧 정부와 반동적 언론으로부터 광범위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곧 프로이센 정부도 마르크스를 노렸다. 1844년 7월 프로이센 대사는 <전진!>이 프로이센 국왕의 시해를 설파한다면서[36]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세금을 빌미로 탄압에 들어갔고 잡지가 이를 교묘히 빠져 나가려고 하자 마르크스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게 추방을 선고했다. 프로이센의 요구에 밀린 프랑스의 이같은 조치는 프랑스 지성계에 큰 항의를 가져와 일부는 추방령이 해제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추방 대상으로 남아야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였다.

비록 프로이센 정부가 벨기에 정부에게 그를 추방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마르크스는 시국에 대해 아무것도 발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계속 체류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자 했다. 비록 프랑스에서 추방당했음에도 파리의 혁명가들과의 서신 교류는 계속 되었으며,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혁명가와 진보적 인사들이 그를 계속 찾아와 주었다. 거기에 더불어 엥겔스가 브뤼셀까지 따라와 자신과 합류하면서 마르크스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도 시행했으며, 동시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 또한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물론을 전수해 준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철학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것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이다. 이 책은 비록 다섯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소책자지만 마르크스의 주요 철학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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