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 독일의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를 역사상 굉장히 영향력이 있었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수철학 및 역사학 그리고 스스로 전문적이라 했던 사회과학에 있어서 그의 이론 자체만으로의 중요성도 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논란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정치계와 경제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으로도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고 봐야 한다.
철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사회복지학, 미술사학 등 많은 학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 2005년 영국의 방송사 BBC가 대중들에게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으며, 공산주의를 정립한 인물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잘 간파하고 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또 현대 독일 정치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9] 독일 내에서도 가장 위대한 독일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어 위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 또는 좌파당 지지자들, 그리고 구 동독 지역의 좌파 사이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이 깊다. 때문에 동독인들이 정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할 때마다 켐니츠에 있는 마르크스 동상에 모여서 집회를 연다. 옛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 지역의 좌파가 카를 마르크스를 앞세워 국가의 재정과 복지를 확대하려는 강경한 시위를 많이 하기 때문에 독일 내 우파와의 충돌이 잦다.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하였고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류 전체의 사상과 철학, 사회, 문화, 외교, 정치, 경제 등의 방향성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매우 중요한 사상가로 지목된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정치이론을 집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으로써 나타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지 여부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 의해 통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임노동자로 부려먹힌다.소위 사적유물론이라는 비판이론에 의해 마르크스는 과거의 사회경제체제들이 그러했듯 자본주의 체제 역시 내재된 결함에 의해 내부적 긴장이 발생할 것이며 그 긴장에 의해 자멸하고 사회주의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불안정성과 위기취약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적대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다.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예측이 현실화되기를 앉아 기다리지 않고, 노동계급이 혁명적 행동으로써 자본주의를 거꾸러뜨리는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저술·출판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마르크스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나 부정하는 입장에서나 모두 마르크스가 인류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의 경제학 저술은 오늘날의 노동 및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해 대부분의 기초를 놓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자, 노동조합, 예술가, 정당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각자 재독해, 변형, 변용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근대 사회학의 뼈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의 트리어 브뤼교로 644번지 이층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당시 프로이센 내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물려받았고,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있어서 그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또한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으며, 루터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모계를 통해서 필립스와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1830년 트리에에 위치한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라틴어, 희랍어, 작문, 수학 등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스승들을 만나며 봉건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또한 사회개혁의 의지도 있어서 1835년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을 써서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나지움 졸업 이후 마르크스는 법학 공부를 바라는 아버지에 뜻에 따라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법학에 열심히 몰두했지만 곧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술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탓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법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공부에도 계속 열을 올렸다. 특히 베를린 대학교는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헤겔주의가 성행했다. 비록 마르크스가 다니던 시절은 헤겔이 사망한 후였으나 헤겔의 제자들이 아직 베를린대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36년 10월, 마르크스는 베를린에 도착해 베를린 법대 시설 이용권을 얻고 미텔가(Mittelstrasse)에 하숙집을 구한다. 베를린 대학교 첫 학기 때 마르크스는 진보헤겔주의를 대표하는 에두아르트 간스(역사의 자유주의적 측면과 사회적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역사는 합리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 역사법학파를 대표하는 카를 폰 자피크니 등 학자들의 강의를 수강했다. 그러나 법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철학에 있었고, '철학 없이 무엇도 성취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법학과 철학을 같이 공부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당시 막 타계했었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유럽 대부분의 철학 학파들이 헤겔의 개념들을 활발히 논의하던 시대였다. 슈트랄라우에서 요양을 한 뒤 마르크스는 헤겔사상 토론 동아리인 박사동호회(Doktorklub)에 가입했다. 그리고 이 동아리를 통해 소위 청년 헤겔학파라 불리는 극단주의 사상가들과 접선하게 되는 게 1837년이었다. 청년 헤겔학파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를 중심으로 모여든 집단이었는데, 마르크스는 그들 중 아돌프 루텐베르크와 친하게 지냈다.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학파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청년 헤겔학파는 변증법을 이용해 기성 사회, 정치, 종교를 좌익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1837년, 마르크스는 문학과 비문학을 모두 써 본다. 마르크스가 쓴 문학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전갈과 펠릭스〉, 희곡 《오울라넴》, 그리고 약혼자 예니에게 바치는 연애시들 따위가 있었다. 이 문학작품들은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는 곧 문학창작을 집어치우고 영어공부, 이탈리아공부, 미술사공부, 라틴어 고전번역에 몰두했다. 1840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함께 헤겔의 《종교철학강의》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또 박사학위논문도 쓰기 시작하여 〈역사법학파 철학선언〉을 1841년에 완성했다. 이 학위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신학이 철학에게 지혜의 상석을 양보해야 한다고 대담하게 논했다.이 논문은 논쟁적이었는데, 특히 베를린 대학교의 보수적 교수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논문 제출을 취소하고, 좀더 진보적인 분위기의 예나 대학교로 가서 거기에 논문을 다시 제출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41년 4월 예나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모두 무신론자였기에, 1841년 3월 《무신론기록원》(Archiv des Atheismus)이라는 제목의 학술지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같은 해 7월,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베를린에서 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둘은 만취하여 교회에서 떠들며 웃고 당나귀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등 기행을 벌여 구설수에 올랐다.
1838년 5월, 마르크스의 부친이 죽으면서 가족의 수입원이 줄어들었다. 마르크스 부자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으며, 부친이 죽은 뒤에도 마르크스는 부친과의 추억을 귀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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