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크스는 법학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이제 그는 철학에 완전히 몰두했으며 1839년부터 철학사 연구를 시작해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비록 급진 헤겔 철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연구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였다. 그렇게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대에서는 박사 논문을 내 봤자 학위를 안 줄 것이라 생각하여 당시 학위 논문 심사가 빠르고 프로이센 정부의 입김이 덜 닿는 예나 대학교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베를린 대학 졸업 뒤 마르크스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이는 곧 좌절됐다.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탄압의 영향이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마르크스의 스승인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 브루노 바우어 교수가 해임된다. 이때문에 마르크스는 교수가 되려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 운동권'에 속했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사의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점차 정치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였다. 그 시작이 프로이센의 검열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였다. 참고로 이 기사는 프로이센 검열당국의 탄압으로 1년 동안 출판되지 못하다가 1843년에야 스위스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1842년부터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인 라인신문의 기고가로 일했다. 그는 독일의 현 정치에 대한 기사들을 썼으며 이는 큰 반향을 낳았다. 곧 그는 신문 편집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편집장이 되면서 라인신문은 기고가의 범위를 늘렸으며, 라인 지역을 넘어서 프로이센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였기에 봉건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충돌이 두드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문은 마르크스의 편집 아래 혁명적, 민주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으며 사회의 현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검열과 정부당국의 탄압을 규탄했으며, 프로이센 내의 봉건체제를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과 민중의 권익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26] 묵인해오던 나뭇가지 줍기(즉 장작)를 금지하는 삼림도벌법을 통과시키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외에도 부르주아지들의 우유부단함과 반동적 낭만주의에 단호히 맞서며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외쳤다.
이런 투쟁 속에서 라인신문은 1842년 1월 정기 구독자 400명의 작은 신문에서 1년 만에 3400여 부를 찍는 대형 신문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과 검열은 계속되었다. 일반 검열관은 물론이고 주 장관까지 검열을 시행하는 이중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한는 일이 빈번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라인신문을 매우 위험하게 바라봤고 마르크스가 계속 저항하자 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이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하는 일이 있자,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 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결국 라인신문은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게다가 이 시기 그의 평생 동지가 되어 줄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만났다.
폐간 이후 크로이츠나흐로 향한 마르크스는 귀족 집안 출신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기로 했다. 예니의 집안은 극심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베를린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출신성분도 좋고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좋은 집안의 딸이 왜 하필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예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43년 6월 결혼을 강행했다. 신혼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틈틈히 썼고, 헤겔의 사상에 대해 재고하며 그의 관념론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도 혁명운동을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학자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가 자유주의와 청년 헤겔주의를 계속 탄압했기에 마르크스의 진로는 좌절되었다. 1842년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사가서 언론인이 되었다. 급진 성향의 『라인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시각과 경제에 대한 관심 등을 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럽 각국의 우익 정부들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역시 무능하거나 역효과만 불러온다고 비판했다. 이런 내용을 계속 싣던 『라인신문』은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원고들 중 불온한 내용이 있는지 당국이 샅샅이 검사한 이후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탄식했다. '경찰이 우리 신문에 코를 박고 킁킁대서, 무엇이든 반기독교, 반프로이센적인 냄새를 맡게 되면 신문을 아예 낼 수가 없다네.' 1843년 『라인신문』에서 러시아 군주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갔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에 『라인신문』 폐간을 요구했고, 프로이센 정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다.
라인신문 폐간과 결혼을 거치고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망명하기 전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혁명가들 간의 교류를 꿈꾸고 있었고, 그들의 협력을 모아 1844년 <독불 연보>를 발행했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여러 기고자들의 논문과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불 연보는 계속 발행될 수가 없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를 돕고 있던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와의 갈등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루게는 청년 헤겔파 출신으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혁명성이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둘은 결별하고 말았다. 대신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다시 만나 둘의 우정의 초석을 쌓았다.
1843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새로 창간된 급진좌파 언론 《독불연지》의 공편자로 취직했다. 독불연지는 독일 사회주의자 아르놀트 루게가 독일과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합작시키자는 목표의식으로 창간한 언론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부부는 1843년 10월 파리로 이사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노가 23번지에서 루게 부부와 동거하다가, 1844년 1월 첫딸 예니가 태어나면서 루게의 집을 나왔다. 《독불연지》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독일 쪽 기고가들로만 가득차게 되었고, 결국 비독일계 기고가는 러시아에서 망명온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이 유일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지면에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한 서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기고했다. 이 중 후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동력이라는 신념을 소개하며 공산주의에 관한 수용을 본격화했다.[58] 독불연지는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하고 폐간되었지만 그 창간호가 상당히 잘 팔렸는데, 하인리히 하이네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를 풍자하는 시를 기고한 덕분이었다. 그 결과 독일계 영방국가들은 독불연지 발행을 금지시키고 수입된 부수들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했음에도 루게는 다음 호를 발행하기를 거부했고, 루게와 마르크스는 절교하게 되었다.[59] 《독불연지》가 이렇게 망하고, 마르크스는 독일어 좌익언론으로 유일하게 검열을 받지 않던 《전진!》지에 기고를 하기 시작했다. 《전진!》은 파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공상적 사회주의 비밀결사 의인동맹의 기관지였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 모임에 여러 번 참여하기는 했지만 가입하지는 않았다.《전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 사상에 기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회주의관을 갈고 닦으면서, 동시에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자나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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