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제1권》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놓아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마르크스는 《트리뷴》이 진보적 논조를 유지하는 이상 계속 기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861년 말 찰스 다나가 퇴사하고 편집주간이 물갈이되면서 신문의 논조도 변했다. 《트리뷴》은 예전처럼 노예해방과 북부연방의 완전한 승리를 부르짖지 않았다. 남부의 노예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부연방과 남부맹방 사이의 즉각적인 평화를 지지했다. 마르크스는 이 새 편집방침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1863년 《트리뷴》에서 잘리게 된다. 한편 다나는 1868년 《뉴욕 썬》이라는 경쟁지를 창간해 자기가 주필을 맡았다.
노동자 혁명들과 각종 운동들이 계속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좀더 철저히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영박물관 열람실에 틀어박혀 다양한 정치경제학 서적과 경제지표들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1857년까지 마르크스는 자본, 부동산, 임노동, 국가, 무역, 세계시장에 관한 800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썼다. 다만 이 원고는 1939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는 미공개로 남아 있었다.
1864년,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소위 제1인터내셔널에 참여하여, 초기 총평의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과 내부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에서 마르크스가 승리했지만, 1872년 총평의회 소재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긴 이후(마르크스도 이 이전에 동의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제1인터내셔널 존속기간 중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사건은 단연 1871년 파리 코뮌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두 달 간 도시를 점거했고, 정부군은 이를 유혈 진압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써서 코뮌측을 옹호했다.
마침내 1859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했다.[165] 《정치경제학 비판》은 마르크스의 저서들 중 경제학에만 집중한 첫 저서로서, 훗날 완성될 《자본론》의 예고편 정도의 의도로 쓰여졌다.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수용, 확장했다. 이 책은 상당히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초판이 빠르게 매진되었다.
1870년대의 마르크스
《자본론 제2권》과 《자본론 제3권》은 마르크스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고 원고로만 남았다. 두 권 모두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출간했다. 《자본론 제2권》은 1893년 7월에, 《자본론 제3권》은 1894년 10월에 출간되었다. 《잉여가치론》은 《자본론》의 "제2원고"였던 《1861년-1863년 경제학 원고》에서 파생된 것인데, 《1861년-1863년 경제학 원고》는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제30책에서 제34책 절반에 해당한다. 《잉여가치론》은 그 중 제30책에서 제32책에 해당한다. 제34책 나머지 절반은 《1863년-1864년 경제학 원고》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원고가 《자본론》 "제3원고"로 여겨진다. 이 제3원고는 펭귄북스판 《자본론 제1권》 부록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잉여가치론》 축약본 독일어판은 1905년과 1910년에 출간되었는데, 1951년 런던에서 이 축약본의 영어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잉여가치론》의 비축약 완전본은 1963년과 1971년 모스크바에서 《자본론 제4권》으로서 출간되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마르크스는 1860년대 초부터 자신의 일생을 집대성한 평생의 역작을 쓰기 시작한다. 3권짜리 《자본론》, 그리고 《잉여가치론》이었다. 《잉여가치론》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 앞선 정치경제이론가들에 대해 논하는 내용인데, 때론 이것이 《자본론》 제4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경제사상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논고이기도 했다. 1867년, 《자본론 제1권》이 출간되었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분석한 것이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토머스 호지스킨의 영향을 받은 노동가치설을 정교하게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호지스킨의 《자본의 범죄로부터 보호된 노동》을 극찬하며 그 영향을 받았음을 《자본론》 지상에서 여러 번 인정한다. 호지스킨은 '개인의 노동에 자연스러운 보상'은 없어졌으며, '각 노동자는 전체의 어떤 부분만을 생산할 뿐이고, 각 부분들은 혼자서는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으니,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논했는데, 마르크스는 호지스킨의 이런 주장을 근대 자본주의 생산하에서 노동의 소외를 방증하는 수단으로서 인용했다. 《자본론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착취의 개념을 설명하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이윤율 급락으로 이어져 산업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871년 가을에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 초판은 매진되었으며 바로 2판 인쇄에 들어갔다. 러시아어판 요청에 따라 1872년 3월 27일에는 러시아어판도 3,000 부 출판되었다.
1881년 3월 8일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러시아가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농촌공동체가 러시아의 사회적 부흥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농촌공동체에게 사방에서 가해지는 해로운 영향들을 먼저 일소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파괴적 영향들을 배제해야 농촌공동체의 '자발적 개발의 정상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는 ……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완전한 격리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편지의 초안들 중 하나에서 마르크스는 최근 인류학에 관심이 생기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미래의 공산주의는 태곳적 과거의 공산주의 이상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의 시대의 역사적 경향은, 유럽과 미주에서 절정에 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치명적 위기다. 그 위기는 자본주의의 파괴를 야기할 것이며, 그 파괴 이후 근대사회는 그 어떠한 태고의 집단생산, 집단사용보다도 더 우월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원시공동체의 활력은 셈, 그리스, 로마 등등 어떠한 사회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컸으며, 근대 자본주의 사회들보다는 더 한층 강력하게 컸다.'고 덧붙였다. 마르크스는 죽기 전에 엥겔스에게 이 생각을 정리해 줄 것을 부탁했고, 1884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출간되었다.
1882년의 마르크스
생애 마지막 10여년간 건강이 악화된 마르크스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없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당대 정치시사, 특히 독일과 러시아의 상황에 관해 논평하는 정도의 활동만 간간히 했다. 1875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통일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자 페르디난트 라살의 국가사회주의와 합작하려 하는 경향에 반대한 서한이다. 마르크스의 또다른 유명한 말인 '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이 문건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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