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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9 (개인사, 일화)

by 클레스트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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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딸 엘리노어에 의하면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예니 카롤리나 마르크스, 예니 라우라 마르크스 (1869년 사진). 마르크스의 딸들은 모두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예니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르크스 부부는 슬하에 일곱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열악한 생활 통에 그 중 장성한 것은 딸 세 명뿐이다.[183] 마르크스의 일곱 아이는 다음과 같다. 예니 "예니헨" 카롤리나(1844년-1883년), 예니 라우라(1845년-1911년), 에트가어(1845년-1855년), 헨리 에드워드 "귀도" 기(1849년-1850년), 예니 에펠리네 "프란치스카" 프란체스(1851년-1852년), 예니 율리아 엘레아노르(1855년-1898년), 그리고 이름도 붙이기 전에 죽은 막내(1857년 7월). 마르크스가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와의 사이에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를 낳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주장은 1962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며 마르크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입증할 만한 물질적 사료적 근거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곤 했는데, 이는 기자 생활을 했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들어오기는 했고, 당대 기준으로 수입이 썩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했는데 부족분을 엥겔스의 재정지원으로 메운 것이다. 그런데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정확히는 사실혼 관계인 여성)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에 대한 답장에 '돈 좀 부쳐달라'고 쓰는 엄청난 결례를 저질렀다. 격분한 엥겔스는 절교를 선언했고, 마르크스의 친지들이 애걸복걸하며 사과하고 달랜 후에야 겨우 화를 풀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사과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재정적으로 굉장히 궁핍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기적인 인성[66]으로 보아 그 사과조차도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셋방을 구할 때 자주 가명을 사용했다. 아마 탄압해오는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파리에 살 때는 '무슈 랑보'(프랑스어: Monsieur Ramboz)라는 이름을 썼고, 런던에서 편지를 보낼 때는 'A. 윌리엄스'(영어: A. Williams)라고 서명했다. 마르크스의 동료들은 그를 '무어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안색이 어두운 편이고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흑발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기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닉 할아버지(Old Nick)'나 '찰리(Charley)'라고 부르라고 했다. 자기 주변사람들에게도 별명을 붙여 부르곤 했는데, 엥겔스는 '장군님(General)', 가정부 데무트는 '렌헨(Lenchen)' 또는 '님(Nym)'이라고 불렀다. 장녀 예니헨은 '중국 황제 취취(Qui Qui, Emperor of China)'라고 불렀고, 차녀 라우라는 '카카도우(Kakadou)' 또는 '호텐토트(Hottento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스스로 '비참한 존재'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건강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았는지 알아보려 했다. 마르크스 전기작가 베르너 블루멘베르크(Werner Blumenberg)는 마르크스가 1849년에 간과 쓸개에 문제가 생겼으며 그것이 평생 갔고,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악화되었다고 한다. 병이 도질 때마다 두통, 결막염, 두부신경통, 류머티즘통이 수반되었다고 한다. 1877년에는 심각한 신경장애가 생겨서 만성 불면증 환자가 되었고 마취제를 맞아가며 잠들어야 했다. 밤중에 일을 하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다 보니 병증은 더욱 가중되었다. 마르크스는 양념을 잔뜩 친 요리, 훈제 생선, 캐비어, 오이 초절임을 좋아했다. 어느것 하나 간부전증 환자에게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포도주와 리큐어를 좋아했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돈이 없어서 저질 시가를 피우니 더욱 몸에 안 좋았다. 1863년부터 마르크스는 종기에 관한 불평을 많이 남기는데, 이것은 간이 안 좋은 환자에게 매우 흔한 증상이며, 아마 간부전증과 원인도 같았을 것이다. 농양이 너무 심해서 마르크스는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고약한 성질머리 역시 간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역사학자 J. E. 시걸(J.E. Seigel)은 마르크스가 10대 시절에 폐렴이나 흉막염에 걸렸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 후유증으로 프로이센 군대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것이다. 《자본론》을 집필하던 시기 마르크스는 건강 삼중고에 시달렸다. 그의 간질환(유전으로 추정)은 과로, 나쁜 식습관, 수면부족으로 악화되었다. 결막염은 밤에 일을 너무 많이 한 탓이었다. 그리고 종기 부스럼은 마르크스의 생활습관(술, 담배, 편식)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전반적 체력쇠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이런 위험한 생활을 바꿔야 한다고 여러 번 훈계했다. 시걸의 논문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런 자기파괴적 생활은 부친에게서 주입된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가책감이었으리라 지적한다.

187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주요 활동이 없으며 대중적인 저술만 가끔 하는 등 조용히 살았고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후에 알제리로 요양갔다가 알제리에서 병이 악화되어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최우선 발생국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과 프랑스를 꼽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독일 역시 후보로 보기는 했다.[60][61] 그런데 세계 정치의 흐름 및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약간의 수정/보완을 가미하여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낙후된 조건, 정확히는 과도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러시아를 공부하는 등 흥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1905년과 191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혁명을 통해 마침내 러시아 땅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 한편 미국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좌초되었고 1948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 하원에서 의석을 확보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아직 내공을 쌓기 이전인 1848년에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을 지지하는 글을 남기는 흑역사스러운 면이 있지만, 내공이 쌓인 이후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나 인도의 세포이 항쟁에 대해 적극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의 독립도 영국 노동자들의 손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부터는 아일랜드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입장을 바꾸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마르크스의 정치스탠스나 정국을 보았을 때 마르크스가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면서 좌절감을 느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1848년 혁명은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결국 실패로 돌아서면서 해외로 망명을 가야되는 신세로 전락한 데다가, 프랑스에서도 의회를 우파가 장악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나폴레옹 3세였으며, 그나마도 몇 년 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국이 되었다. 이후 미국 신문 기자로 일했을 때 칼럼을 쓰면서 링컨과 공화당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고 남북전쟁에서도 북군이 승리하면서 미국이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러스트에 의한 강도 귀족 시대가 열렸으며 노예제만 없어졌을 뿐, 인종차별 정책은 다시 부활하고 말았다.

또한 영국에서 살았을 때는 그나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기는 했고, 하층민들이 선거권을 쟁취하는 모습도 지켜 보았지만, 영국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노동자와 식민지를 열심히 착취해대는 더러운 꼴을 많이 보았고,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 또한 좌절되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파리 코뮌이 일어났지만 이것도 좌절되었다. 이후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철권통치를 하면서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못보고 사망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이 되는 걸 보고서라도 갔던 엥겔스보다는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았다. 마르크스의 서적이나 문집을 연도별로 보면 생각 외로 스탠스가 변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한데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초판 2권 '그대의 눈길을 부드럽게...' 편에 따르면[65] 1933년 타계 50주기를 기념해 흉상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나, 1948년 British Pathe 영상을 보면 가족묘 형태였고 현재의 것은 1955년에 만들어졌다. 묘비 위에 있는 흉상은 조각가 로렌스 브래드쇼(1899~1978)가 만들었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유해는 절친한 친구 엥겔스와 자식들, 친구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러주었고 런던의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묘지[62] 동편에 안장되었다. 직접 찾아가려면 런던 지하철 노던 선을 타고 Archway역에 내려서[63] 하이게이트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측에서는 아예 입구에서 마르크스의 묘비 사진을 붙여놓고 홍보하고 있고, 매표소에서 입장권[64]을 구매하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표를 건네주면서 마르크스의 묘지 위치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묘하게도 마르크스 무덤 맞은편에는 허버트 스펜서의 무덤도 있다.

원래는 묘지 주 도로보다 좀 더 안쪽에 묻혔었는데, 마르크스 묘지를 방문하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늘자 접근성 문제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 안장되어서 훨씬 찾아가기가 쉬워졌다. 예전 무덤 자리에도 석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금가고 흐릿해져서 읽기 힘들다. 묘비에는 마르크스 얼굴 동상과 함께 그가 남긴 두 가지 유명한 말이 적혀 있다. 묘비 상단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하단에는 상술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의 글귀가 적혀 있다. 냉전 시대만 해도 세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성역시했던 곳이었으나 1989년 동구권 붕괴 후 순수 관광객이 전체 참배객의 99%를 점하고 있다.

매년 3월 13일마다 마르크스 기념 도서관 주최로 카를 마르크스 기념 연설이 열리며 초청받은 사회주의 사상가/노동 운동가가 연설한다. 묘지에 입장료만 낸다면 참석은 자유이다. 웃긴 점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매우 동떨어지고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금지하는 기형적인 공산주의 국가 출신인 주영국 북한 대사가 매년 참석한다는 것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 동편 카를 마르크스 석묘.
1881년 12월 아내 예니가 죽었다. 마르크스는 카타르염에 걸렸고, 이것이 기관지염과 흉막염으로 발달하여 처음 발병한 지 15개월 뒤인 1883년 5월 31일, 향년 63세의 무국적자로 사망했다.[193] 1883년 3월 17일 장례식이 치러졌고, 런던의 가족들과 동료들은 그를 하이게이트 묘지 동편 불가지론자-무신론자 묘역(조지 엘리엇의 묘가 근처에 있다)에 매장했다. 장례식 참석자는 아홉 명에서 열한 명 사이였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가까운 동료들이 추모사를 읽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3월 14일 오후 3시 15분 전, 산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사상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마르크스의 두 딸 엘레아노르와 라우라, 그리고 사위인 샤를 롱게와 폴 라파르그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롱게의 아내인 장녀 예니헨 마르크스는 1883년 1월 아버지보다 두 달 먼저 죽었다.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위원이었던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어로 연설을 했고, 프랑스 노동운동가였던 롱게는 프랑스어로 짧게 추모사를 남겼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노동자 정당에서 각기 전보를 보내왔고 그 내용도 낭독되었다. 엥겔스의 연설과 함께 장례식 절차는 이와 같았다.[195] 친지가 아닌 참석자들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운동의 옛 동지들이었다. 1852년 쾰른에서 공산주의자 재판으로 3년 수감되었던 프리드리히 레스너(Friedrich Lessner),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 동맹의 고참 맹원'이었던 G. 로흐너(G. Lochner), 그리고 맨체스터의 화학 교수이자 왕립학회 석학회원이며 1848년 바덴 혁명에 참여했던 카를 쇼를레머가 그들이었다. 그 외에 영국 동물학자 레이 란케스터도 참석했다.

엥겔스는 1895년 죽으면서 마르크스의 두 딸에게 상당한 몫의 유산을 떼어 주었다. 그 가치는 2011년 물가로 미화 480만 달러 정도였다.

마르크스 일가는 1954년 11월 지금 자리로 이장되었고, 1956년 3월 14일 카를 마르크스 석묘가 제막되었다. 마르크스 석묘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장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마르크스의 원래 무덤은 장식이 소박했으나, 영국 공산당이 새 석묘에 로런스 브래드쇼가 조각한 큼직한 흉상을 올려놓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마르크스가 실패자로 죽었다 말할 수 없다.' 비록 영국에서는 그의 이론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의 저작은 이미 그 생전에 독일과 러시아에 거대한 좌익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죽고 불과 25년 뒤, 마르크스의 영향을 인정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이 유럽 각지에서 15%에서 47%에 이르는 득표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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