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화폐 가치의 안정을 경제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통화주의(monetarism)를 제창하였고 1970년대 이후 미시경제학과 더불어 주류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밀턴 프리드먼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대중적인 지식인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로 거시경제학을 위시하여 미시경제학, 경제사, 경제통계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76년에 소비분석, 통화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논증 등의 업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세계 진보주의자들로부터는 신제국주의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이론을 만든 ‘금융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나중에 이 시리즈의 내용은 자신의 아내 로즈 프리드먼과 공동저자로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졌고 뉴스위크에 칼럼으로도 실렸다.
프리드먼은 케인즈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제학자로 여겨진다. 프리드먼은 폴 새뮤얼슨과 학문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정치적·사회적 자유의 창조의 수단으로 자유시장 내 정부가 맡는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텔레비전 시리즈인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 1980년대 PBS 방송국에서 방영)에서 프리드먼은 자유시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설명하고 여타의 체제에서 풀지 못한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유시장의 작동원리를 강조하였다.
일각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을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서,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저명한 경제학자로 성장해, "20세기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고문을 맡았기 때문에 보통 보수 우파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프리드먼은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생각해서, 마약과 매춘의 합법화를 지지하기도 했고 "게이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서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으며, 합법적인 이민 뿐만이 아니라 불법적인 이민조차 경제에 이롭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통계학 분야에서 프리드먼 테스트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를 더욱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로 생각했던 프리드먼은 시장의 장점과 정부 개입의 단점을 강조하였다. 프리드먼의 정치철학은 미국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가다듬었고 미국의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정부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다른 많은 나라의 경제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태인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출생하였다. 15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병을 앓다가 숨지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1928년 16세에 장학생으로 인근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그는 숱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아침에는 백화점에서 모자를 파는 점원으로, 점심 무렵에는 학교 근처의 식당에서 음식을 날랐고, 밤에는 소방서에서 야간근무를 했다.
1932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한 그는 1933년 시카고 대학교 에서 석사 학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이후 1935년부터 10년간 미국 재무부, 국립자원계획위원회(National Resources Planning Board) 등에서 근무했고 1946년 시카고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약 3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이러한 인생 역전 때문에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제로 이루어낸 학자로도 손꼽힌다.
처음으로 프리드먼을 학계의 유명인사로 변화시킨 것은 같은 시카고 학파 출신인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와 1946년에 공동집필 발표한 한 논문 소책자였다. 지붕인가 천장인가? 현재의 주택문제(Roofs or Ceilings? The Current Housing Problem)#[12]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그는 캘리포니아의 주택 임대료 규제가 궁극적으로 주택 가격을 인상시켜 정치인들이 도우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즉 규제 당국이 주택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어 잠재적 주택건설업자들에게서 더 많은 주택을 지을 수 있는 인센티브(=더 높은 이윤)를 박탈하였고 결국 집값을 떨어뜨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논문 책자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격렬했다.
1946년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이론을 가르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리드먼은 앞으로 30년 동안 시카고 대학에서 일할 것이다.그곳에서 그는 다수의 노벨 기념상 수상자를 배출한 지식인 공동체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이를 통칭하여 시카고 학파로 알려져 있다. 1946년 당시에 워싱턴포스트에 언급되는 경제학자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이 덕분에 그는 대중에 강한 인상을 주었한 경제학자는 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프리드먼의 책자는 보수반동 이익집단의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출판된 교활한 책자이며 책 속의 말들은 모두 허튼소리라고 비난하였다.
1947년에는 스위스 몽펠르랭에서 열린, 후에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로 알려지게 될 주요 신자유주의자들의 첫 모임에 미제스, 하이에크, 칼 포퍼 등과 같은 유럽 출신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미국 태생의 젊은 멤버로서 참석했다.
1953년, 실증 경제학의 방법론(The Methodology of Positive Economics)을 출판했다.
1954-1955년을 케임브리지의 곤빌과 카이우스 칼리지에서 풀브라이트 방문 펠로우로 보냈다. 당시 케임브리지 경제학과 교수진은 케인즈 다수파(조안 로빈슨)와 반케인즈 소수파(데니스 로버트슨 )로 나뉘어 있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견해가 케임브리지 파벌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펠로우쉽에 초대되었다고 추측했다. 이후 뉴스위크지의 주간 칼럼(1966-84)은 잘 읽혀지고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커졌으며 1968년 잡지에 제럴드 롭 특별상을 수여하는 데 일조했다.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이야 말로 민주적 표현의 진정한 영역이라 주장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갑으로 사회가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방식에 대한 선호를 표명하고 기업들은 수익성 있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반응한다고 했다. 반면, 정치 체제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시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선호의 종류를 제한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자유방임의 자유국가와 국가 사회주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둘 다를 가질수는 없다고 주장했는데, 프리드먼의 말에 따르면, 뉴딜 정책 이후로 미국이 추구해온 정부 스타일은 잘못된 쪽에 서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는 필요하지 않은 문제에서 벗어나야 하고 국민과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63년, 안나 슈워츠(Anna Schwarts)와 공동저술한 미국 100년간의 통화 역사(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의 미국 경제의 전반에 걸친 화폐량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대공황은 시장실패가 아니라 정부실패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 내 정부가 맡는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학자로 시장의 장점과 정부 개입의 단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정치철학은 미국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전적이며 보수적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옹호자로 1976년에 '소비분석, 통화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논증' 등의 업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때문에 그는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자', '자유경쟁체제의 굳건한 옹호자', '통화주의의 대부', '작은 정부론의 기수', '반(反) 케인즈 학파의 창시자' 등 다양한 이름이 따라다닌다. 어찌보면 1970년대 이후 정부실패로 인해 가장 주목받는 경제학자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의 경제 전문가들은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충실하게 따른 국가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 프리드먼은 그린스펀의 통화정책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린스펀의 통화정책이 꽤 오래 성공적이자 죽기 전에 그린스펀의 통화정책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알다시피 2008년 금융위기로 그린스펀의 '재량적 통화정책'은 비판을 받는다.
1977년, 65세의 나이로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에서 30년 동안 가르친 후 은퇴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는 샌프란시스코 연방 준비 은행의 방문 학자가 되었다. 1977년부터 그는 스탠퍼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에 소속되었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통화 공급 사이에는 밀접하고 안정적인 연관성이 있으며 주로 통화 기반 성장률을 적절히 조절하면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화폐 공급에 대한 관심을 산출물의 명목 가치, 즉 화폐수량설의 결정 요소로서 되살린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통화주의는 현대 수량 이론과 관련된 일련의 견해이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화폐 공급과 경제 활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였던 1867-1960년 미국 화폐사를 안나 슈워츠와 함께 공동 집필했다.
프리드먼은 통화주의 경제학파의 주요 지지자였다.
루카스는 프리드먼의 적응적 기대 대신 합리적인 기대치를 추정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정교하게 고안했다. 이 개혁으로 인해 새로운 고전적 필립스 곡선의 이론이 내재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수정은 프리드먼 자신의 접근법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프리드먼 필립스 곡선의 이론도 바뀌었다. 게다가 1960년부터 1963년 사이 시카고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새로운 고전파 신봉자 닐 월리스는 프리드먼의 이론 강좌를 엉망이라고 간주하여 통화주의와 새고전파 사이의 긴장된 관계를 강조했다.
프리드먼과 로버트 루카스, 즉 새고전학파 거시경제학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은 루카스에게 흥미로운 출발점이었지만, 그는 곧 프리드먼이 제공한 해법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957년 프리드먼은 또한 소비 함수, 항상소득 가설에 대한 그의 연구로 알려져 있는데, 프리드먼은 그것을 자신의 최고의 과학적 연구라고 언급했다. 이 연구는 효용을 극대화하는 소비자가 항상소득으로 인식한 금액의 비례적인 금액을 지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경제학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과학으로서의 가치 판단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유용한 경제 이론은 서술적 사실주의가 아니라 예측의 도구로서의 단순성과 성과로 판단되어야 한다. 즉, 학생들은 '가정의 건전성'보다는 예측의 정확성을 측정해야 한다. 그의 주장은 레너드 새비지, 로널드 피셔와 같은 통계학자들 사이에서 진행 중인 논쟁의 일부였다.
프리드먼은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답게 자유가 중요한 것은 자유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적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했다.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
선택할 자유
화려한 약속, 우울한 성과
관련문서
샤워실의 바보
경제학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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