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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by 클레스트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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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1973년 바실리 레온티예프 
1974년 프리드리히 아이에크
1975년 레오니트 칸토로비치, 찰링 코프만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CH, 1899년 5월 8일 ~ 1992년 3월 23일)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1938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1974년 화폐와 경제 변동에 관한 연구로, 이데올로기적 라이벌인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더불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미국 대통령 자유 메달(U.S.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1980년대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원으로 자유주의 이념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저서로는 《노예의 길》(1944), 《자유헌정론》(1971),《치명적 자만》(1988)이 있다. 

화폐적 경기론과 중립적 화폐론을 전개하였고,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계획경제에 반대했다.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 좌파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고, 케인스의 이론에 대항하여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옹호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하이에크는 학술적 삶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등에서 보냈다.

사회주의는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가 확립되지 않아 개별 상품에 대한 가격 정보를 얻을 수 없고 또 성과금 제도, 즉 인센티브가 없기에 경제가 망할 것으로 예언했는데 소련의 몰락으로 현실화되었다.
활동 영역의 광대함이나 연구 스타일을 보면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과 유사하다.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임했던 자세나 방법은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나온다. 

경제학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치·사회·문화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활동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서구 복지국가가 복지병과 경기침체 현상을 안게 되면서 자유시장 중시와 계획경제 비판을 요체로 한 그의 이론이 재조명되었고,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을 필두로 하는 신자유주의 출현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저서로는 《노예의 길》, 《자유헌정론》,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등이 있다. 1994년 발행 50주년을 맞이한 《노예의 길》에는, 밀턴 프리드먼이 쓴 서문이 보태졌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비엔나의 어거스트 본 하이에크와 펠릭시타스 하이에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가운데 이름을 물려준 아버지 또한 비엔나에서 1871년에 태어났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저명한 학자 집안이었는데 그의 조부 구스타프 폰 하이에크(Gustav von Hayek, 1836-1911)는 자연과학을 가르치던 교수였고 그의 외조부 프란츠 폰 유라셰크(Franz von Juraschek, 1849-1910)는 경제학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똑똑했다고는 하나 공부를 그닥 잘하지는 못했고 대신 생물학이나 희극을 쓰는 데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 입대해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했는데 전투에서 왼쪽 귀를 다쳤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 의해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그의 집안은 귀족 접두어인 폰(von)을 이름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식물학에 관한 논문을 여럿 썼을만큼 식물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트 본 하이에크는 비엔나 대학의 파트타임 식물학 강사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의 어머니는 1875년에 부유하고, 보수적인 지주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상당한 유산을 받게 되었는데, 그 유산은 신혼기간 동안 그녀와 어거스트의 수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이에크는 1년 반 터울의 동생인 헤인에크, 5년 터울의 동생인 에리히를 둔 장남이었다.

그는 생물학 분야에서 체계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 중 일부는 비교적 잘 알려져있다.
대학의 교수로서의 아버지의 경력은 나중에 프리드리히의 목표에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가 알 수 있을만큼 오래 산 그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학자였다. 프란츠 폰 쥐라스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두적인 경제학자였고, 오스트리아 경제대학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오이겐 폰 바웨르크의 친한 친구였다. 프리드리히의 친할아버지, 구스타브 에들러 폰 하이에크는 비엔나 왕립 Realobergymnasium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 쪽에선 하이에크는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둘째 사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종종 비트겐슈타인의 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며, 루트비히를 잘 알고 있었다. 가족관계로 인하여, 하이에크는 이 책이 출판된 1921년, 독일어판으로 출판되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를 처음으로 읽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이에크가 비트겐슈타인을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분석 방법이 그의 삶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의 말년에는 비트겐슈타인과 함께한 철학 토론을 회상하곤 했다. 두 사람 모두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장교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죽음 이후에,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쓸 생각을 했고, 그의 가족 자료를 모으는 것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는 데에 기여했다.

하이에크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지적이고 학문적인 소질을 보였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유창하고 빈번하게 읽었다. 그의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하이에크는 십대 때, 휴고 데 브리에스의 유전학과 진화학에 대한 작품들을 읽었고, 포이어바흐의 절학적인 작품들도 읽었다.

학교에서 하이에크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에 대한 한 강사의 강의에 매료되었다. 출간되지 않은 자서전 기록에서는 하이에크가 그의 어린 동생들과의 분열을 회상했지만, 그는 자신이 다른 세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른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17년,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포병 연대에 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다. 하이에크의 전투의 대부분은 비행기에서 관측자로 일하는 것으로 보내졌다. 하이에크는 전쟁 중에 왼쪽 청각에 부상을 입었고, 이 기간 동안 하이에크는 1918년 독감 전염병에서도 살아남았다.

재미있게도 하이에크는 20대 초반까지 사회주의자였다. 전쟁 중에 볼셰비키 혁명을 겪고, 사회주의 팸플릿과 사회주의 경제학 서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에 빠져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하이에크는 빈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 심리학, 경제학 등을 배웠고 이 과정에서 카를 멩거(Carl Menger)와 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빈 대학교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만나, 그의 저서 '사회주의'(Socialism, 1922)를 접하고 나서,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였다.

1921년 법학 박사학위를 1923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경제 고문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비서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대학교 제리마이아 쟁스 (Jeremiah Jenks) 교수의 연구 조교로 일했으나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해 1년만에 귀국했다.

그후 1927년 오스트리아 경기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1931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부터 미국의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말년에는 서독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다.

하이에크는 전쟁으로 이어진 실수들을 피하는 것을 돕는 것을 결심했고, 학문적인 직업을 갖기로 결정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은 정말로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조직의 문제에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50년에 하이에크는 런던정경대학에서 떠났다. 1949-50년을 아칸소 대학의 객원 교수로 보낸 후,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하이에크의 봉급은 대학이 아니라 외부 재단인 William Volker Fund가 지원했다.

하이에크는 1940년대 시카고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하이에크는 시카고 대학에서 여러 세미나를 진행했으며, 연구 프로젝트에 많은 학자가 참여했다. 하이에크, 프랭크 나이트,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는 자유주의 정치 경제학자들을 위한 국제 포럼인 몽페를랭회(Mont Pèlerin Society)를 구성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

시카고에서 하이에크의 첫 번째 class는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시월 라이트(Sewall Wright), 레오 실라르드(Leó Szilárd)를 비롯한 많은 대학의 과학자들이 참석 한 과학 철학에 관한 교수 세미나였다. 시카고에서 근무하는 동안 하이에크는 과학, 경제, 정치 철학 및 사상의 철학을 연구했다. 하이에크는 1954년에 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서신을 편집한 그는 자유주의 질서와 자유 문명의 창조적 힘에 관한 책을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59년 5월에 《자유헌정론》을 완성했고, 1960년 2월에 출판했다. 하이에크는 그 책이 《노예의 길》이 16년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열렬한 일반적 수용을 받지 않았던 것에 실망했다.

1974년 10월 9일 스웨덴의 경제학자인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하이에크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발표되었다.

경제 계산 문제(사회주의 계산 논쟁)

다른 사람들의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하이에크는 중앙 계획 경제에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자원의 분배를 결정해야 하지만, 이러한 계획자는 이 할당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제스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경제 계산에 반대하는 논쟁을 펼쳤다. 오스카 랑게(Oskar Lange)가 신고전파 이론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증을 내놓자, 그는 신고전파의 완전정보모형이 현실과 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펼쳤고 신고전파 경제 이론과 멀어져 갔다. 그는 대다수 동료 경제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작성된 그의 논문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 (1945)는 중요한 경제학적 업적으로 꼽힌다. 그가 사회주의 논쟁에서 보여준 접근법은 현대 정보경제학에서 볼 때 굉장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사회에서의 지식의 사용"(1945)에서 하이에크는 가격 기구가 지역 및 개인 지식을 공유하고 동기화하여 사회 구성원이 자발적 자기 조직의 원칙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격 기구를 중앙 계획과 대조하여 시간과 장소의 특수한 환경에서의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일련의 공헌으로 이 관점에 도전했다. "경제학과 지식"(1937)에서, 그는 표준 일반 균형 이론은 모든 행위자가 완전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믿는 것의 일부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경기변동론

1920년대에 유럽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고, 인플레이션에 극도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런던정경대학으로 옮겼고, 1930년대에 케인스와 대립하는 가운데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경기 변동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이에크의 경제학에 대한 주요 연구는 자본, 화폐 및 경기 순환에 관한 것이었다. 미제스는 더 일찍 한계 효용의 개념을 《화폐와 신용의 이론》(1912)에서 화폐의 가치에 적용했다. 
그의 《가격과 생산》(1931)에서, 경기 순환은 중앙 은행의 인플레이션 신용 확대와 시간 경과에 따른 그것의 전송으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낮은 금리로 인한 자본의 잘못된 배분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과거 시장 경제의 불안정성은 시장 메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규제 기관인 화폐가 시장 과정에 의해 규제되는 것에서 배제 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인스가 1936년 일반이론을 발표하자 런던정경대학의 제자들 대다수가 케인지언으로 돌아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케인스의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면서, 경기 변동 이론가로서의 그의 연구 업적은 빛을 잃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경제학이 혼란스럽고, 이런 것들이 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폴 크루그먼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 이론을 플로지스톤설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하이에크는 순수 자본 이론에서 약속했던 "자본의 역동성"에 대한 서적 길이의 설명을 결코 만들지 못했다. 1941년 이후 그는 정보학, 정치 철학, 법 이론 및 심리학의 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계속 발표했으나 거시경제학에 관련해서는 거의 출간하지 못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하이에크는 경제학과의 일원이 아니었고 거기에서 일어난 신고전파 이론의 부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974년에 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과 함께 수상했을 때, 뮈르달은 "이데올로그"와 짝을 지었다고 불평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이 "하이에크에 대해 엄청난 찬사를 보냈지만, 그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면서 "《가격과 생산》은 매우 결함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자본의 순수 이론》은 "읽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회와 정치 철학
경력 후반기에 인간 지식의 한계와 사회 제도에서의 자발적 질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사회와 정치 철학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국가의 기구가 거의 전적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자유 개인의 시장이 기능하는 데 필요한 법질서를 시행하기 위해 독점적으로 고용되는 시장질서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 지식의 본질적 한계에 관한 인식론적 우려에서 파생된 도덕적 철학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하이에크는 그의 이상적인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시장적인 정치는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 좋은 사람을 찾는 데 그 기능을 의존하지 않는 사회"가 될 정도로 자기 규제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하이에크를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은 이 책이 나오고 몇 십 년이 흐른 뒤에야 그의 주장에 주목하였고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정치인은 후술할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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