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4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10 (사상) 받은 영향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러 다른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과격한 일부는 마르크스와 헤겔에는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띤다는 헤겔의 관점을 가져오되 이성의 발전과 종착역을 설정한 헤겔의 관념론과 차별점을 두면서 생산 양식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경향적 이행을 주장했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의 다양한 사상적 면모들 중에서 그가 핵심으로 삼았던 과학적 공산주의의 측면을 아주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공부가 요구된다. 리쿠르고스의 강제적 자원.. 2023. 4. 17.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8 (자본론) 《자본론 제1권》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놓아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마르크스는 《트리뷴》이 진보적 논조를 유지하는 이상 계속 기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861년 말 찰스 다나가 퇴사하고 편집주간이 물갈이되면서 신문의 논조도 변했다. 《트리뷴》은 예전처럼 노예해방과 북부연방의 완전한 승리를 부르짖지 않았다. 남부의 노예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부연방과 남부맹방 사이의 즉각적인 평화를 지지했다. 마르크스는 이 새 편집방침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1.. 2023. 4. 17.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6 (망명기) 영국에서의 저술활동은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1849년 독일 쾰른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렇지만 밑천을 까먹은 채로 추방당해서인지 이전까지 풍족하게 살았던 마르크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다. 신문 기고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런던에 살면서 낙후된 주택에서 주거하고 그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결국 자식 6명 가운데 3명이 죽는 비참한 경험을 하고 만다. 이후 경제적 어려움은 엥겔스의 지원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를 통해 겨우 개선되었다. 그렇게 마르크스는 런던 중심부에 .. 2023. 4. 16. 공산주의를 정립한 카를 마르크스-5 (헤겔주의, 라인신문)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 2023. 4. 16. 이전 1 다음